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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안 메시지의 정체

한밭춘추 - 대전일보 2014

by 그림씨 2023. 1. 3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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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안 메시지의 정체

2014 대전일보 한밭춘추 12. 24 ./조 훈 성(연극평론가)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는 “하나의 위대한 생각이 등장할 경우 그것이 최소한 얼마 동안은 당시 존재하는 다른 모든 생각이나 개념들을 압도할 만큼 갑자기 유행하게 된다.”라고 말하였다. 이 불분명한 세계에 ‘저명한 권위’가 모든 문제를 쉽게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극장 안 사정도 어떤 ‘권위’에 짓눌려 있긴 별반 다르지 않다. 극장에서 어느 저명한 작가나 연출, 또는 배우의 ‘위대한 생각(?)’에 압도당하여 그 개념으로 모든 사물 대상을 판단하고 평가할 때가 많다. 그렇게 우리는 ‘개념’의 아우라에 짓눌려 어떤 연극에 잔뜩 긴장되어 있기 일쑤다. 대전의 소극장 금강에서 본 <죄와 벌>을 보면서 나는 압도적 두께의 고전이 주는 ‘아우라’를 생각해본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그 소설을 다시 연극으로 옮긴다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적어도 이 연극이 그런 ‘아우라’의 공포를 덜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극장에 들어섰다. 하지만 고뇌하는 ‘라스콜리니코프’는 그 ‘위대한 생각’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어 보였다. 내게 중요한 것은 한 텍스트를 연극화하기로 한 동기와 의도다. 그것이 선명하게 보였다면, 도스토옙스키를 처음 들어본 이든, <죄와 벌>을 읽지 못한 이들에게 그 극장은 컬러풀했을 텐데 모노크롬(monochrome)하기만 하니 아쉬웠다.

거기에 비해 서울 대학로예술극장에서 본 <바냐와 소냐와 마샤와 스파이크>는 안톤 체홉과 그의 대표작인 〈갈매기〉·〈바냐 아저씨〉·〈세 자매〉·〈벚꽃 동산〉 등을 모른다 하더라도 극장을 나설 때 적어도 ‘바냐’가 말하는 ‘현대인의 상실과 소외’ 정도는 고민하고 나설 수 있게 된다. ‘짓눌려 있지 말자’는 말, 참으로 어려운 말이 아닐 수 없다. 현실세계가 되었든, 망상의 세계가 되었든, 그 세계의 ‘꿈’과 ‘억압’ 등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살기란 정말 불가능하기 짝이 없다.

근 십 년 만에 다시 <루나틱>(백재현 연출, 대전 가톨릭문화회관 아트홀)을 봤다. 닐 사이먼의 <굿 닥터>를 원작으로 한 이 뮤지컬을 보면서, 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굿 닥터>를 모르면 어떤가. 극장에서 행복한 이들의 얼굴을 둘러본다. 그러고 보니 그 십 년 전 <루나틱>을 보다 당한 ‘수모’가 새삼 기억난다. 맨 앞자리에서 다리 꼬고 팔짱끼며 심각한 ‘포즈’로 불편하게 앉아있는 내게 백재현이 말했다. “너 땜에 모두가 힘들어. 너 때문에 모두가 불행하잖아. 좀 웃기면 웃어!”하고 나를 사정없이 질책했더랬다. 연극이 끝날 때까지 이 작품에 출연하는 모든 이에게 그 말을 매 장면마다 들어야 했다. 어찌나 창피하던지. 하지만 정말 ‘짓눌려 있는’ 내게 ‘짓눌려 있다’고 말해준 그에게 정말 감사했다. 어쨌거나 ‘메시지’는 현실의 표현과 공감에 있어야 한다. ‘너와 내가 지금 이곳에 왜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메시지의 정체가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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