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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는 싹을 언제 틔울지 약속하지 않았다

그림씨 스토리 잡글/그림씨 잡설

by 그림씨 2023. 5. 17.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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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날이라서 녀석은 나랑 종일 함께 놀아야 한다. 녀석이 하원 버스를 내리자마자 제 친구들이랑 다섯 시에 놀이터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며 집에 와서도 시계 긴 바늘이 12에 다다르길 기다리며 수십 번은 시간을 물어본 듯하다.

시계도 못 보면서 저희들끼리 약속을 했단 게 우습기도 하고 어쨌든 나가 놀기 전에 학습지 푸는 것도 곁에서 챙기면서 덩달아 내 일은 뒷전에 녀석의 스케줄을 위해 간식이며 음료수들도 챙겨 넣는다.

백여 년 전 시계 없이 대충 해가 중천쯤이든, 산에 해가 걸릴 때쯤이든, 언제쯤 만나자는 조상들 마냥, 시계도 안 보고 바깥으로 뛰쳐나갈 생각만 한다.

친구들에게 나눠 줄 보석반지통까지 들고 놀이터에 후다닥 달려나왔으나 제 친구들은 아무도 없이 바람만 휭-휭 분다.

빈 그네, 빈 시소, 빈 미끄림틀...
친구들을 기다리며 캐치볼도 하고, 그네도 밀고... 근데 눈길은 나를 보지 않고 놀이터 서너 갈래 길에 누가 오는지에 정신이 팔려있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얼굴이 점점 뾰로통해진다. 결국은 자존심도 없이 옆단지 놀이터까지 제 친구를 찾아 나서자고 떼를 쓴다. 녀석을 달래며 '약속'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날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를 따지지 않고 그저 이따가 만나자는 녀석들의 약속, 어쩌면 그 정함의 시작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오늘의 기다림, 그 서운함을 묶어 아파트 둘레를 딸의 손을 잡고 일부러 더 큰 웃음 소리로 바람을 쐰다.

"괜찮다, 너는 기다린 사람이고, 기다리게 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괜찮다, 너는 친구들에게 나눠줄 반지통을 기꺼이 챙겨 나왔고, 그저 누가 끼어주길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집에 돌아와 밸런스볼에 트램펄린까지 방방 뛰면서 덕분에 내 뱃살도 오래간만에 출렁출렁 한다. 티니핑도 틀어주고 짜장면도 같이 만들기로 하고, 국수를 끓이기 위해 냄비에 물을 받는다.

"괜찮다. 너는 앞으로 수백 만 번의 약속을 할 테지. 그리고 그 약속 앞에 또 얼마나 가슴 아파할 일이 많겠으며."

괜히 분무기를 들고 제 작은 화분에 물을 준다. 꽃씨는 싹을 언제 틔울지 약속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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