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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아픔과 고통을 그 누가”-「노스체」(황정은 작/윤성호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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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한국연극≫ 3월호 게재

“여러분의 아픔과 고통을 그 누가”- 「노스체」(황정은 작/윤성호 연출)

출연/김은희, 선명균, 박윤정, 최희진(노스체 역), 윤정로(현 역), 김민주(희 역)

공연일시: 2023년 2월 3일(금) ~ 12일(일)

공연장소: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글_조훈성 (연극평론가)

1. 재난 이후, 돌이킬 수 없는 삶의 이야기

2008년부터 시작된 <공연예술창작산실>은 기초 공연예술 분야의 특성을 살린 단계별 지원을 통해 장르별 우수 창작 작품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사업이다. 그 가운데, <올해의 신작>은 공연창작의 단계별 과정 지원을 통해 우수한 신작을 발굴하는 ‘2022 올해의 신작’에 선정된 작품들로써, 각 단계 별 성과를 바탕으로 무대 위에 얼마나 다양한 주제와 완성도 있는 작품을 관객들에게 선보일지 자못 기대가 컸다. 그 가운데, ‘프로젝트집단 세사람’의 「노스체」(황정은 작/윤성호 연출:대학로예술소극장, 2.3.~2.12.)는 재난 이후의 돌이킬 수 없는 삶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서 이에 대한 작가적 시선과 그 연극적 세계를 어떻게 참신하게 무대화할지에 대해 호기심이 컸던 작품이었다.

작품은 원전 폭발 이후 사고 중심지 인근 마을을 배경으로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옥’, ‘현’, ‘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고 이후 무려 2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재난로봇 ‘노스체’가 이 마을이 회생 가능한지를 을 확인하기 위해 들어오게 되고, 이와 함께 폭발사고 인근 마을을 관광으로 찾았다가 길을 잃은 사진작가 ‘필’과 함께 오랫동안 마을을 떠나 있었던 현의 엄마 ‘연’이 마을로 돌아오면서 이 재난구역에 남은 이들의 삶터는 새로운 변화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가 이 작품을 주목하게 되는 것은, 재난 이후의 관념적 회복의 시간을 구체화, 표면화하는데 있어서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지켜온 사람, 사물에 대한 접근이라는데 있다. 즉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찰자적 시점이 아닌 방사능 탐지기가 삐삐- 울려대는 고양이와 멧돼지를 포함한 재난이 만들어낸 이 구역의 모든 산물의 입장에서 그 당사자적 입장을 섬세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 이 연극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대비적으로 바깥의 시선을 대리하는 탐사로봇‘노스체’가 이곳에 남은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어떻게 체득하게 되는가는 이 작품에서 특히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인간이 아닌 ‘노스체’ 뿐만 아니라 섬 같은 마을을 찾은 사진작가 ‘필’이나 현의 엄마 ‘연’의 역할 역시 재난으로 격리된 이 세계에 남겨진 이들의 고통과 상처에 대한 깊이 있고 다양한 태도를 보여주는 데 합당한 목적을 수행하고 있다. 결국 이 연극이 근본적으로 묻고 있는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대신해 희생될 누군가를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에서 저 멀리 떨어진 재난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염려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저 바깥에서 안전하게 살고 있다는 믿음, 그 확신 속에서 타인의 고통과 상처의 이미지가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의 ‘연민’으로 다가오지만 그것이 우리 가까이에서는 ‘혐오’와 ‘차별’이라는 이중적인 태도를 지니게 된다는 것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2. 버티기와 익숙해지기 : 별세계의 인물들

이 작품에서의 각 인물의 배치는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 폐허와 같은 마을에 남겨진 이를 대표하는 ‘옥’, ‘현’, ‘희’라는 인물의 성격의 창조는 단지 나이가 많고 적음의 유형적인 인물의 구성을 넘어, 재현된 재난사회의 당사자로서의 그 회복에 대한 욕망의 속성을 제대로 성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대 연출적인 면에서 살펴본다면, 단지 외형적 공간 배경을 궁핍한 마을로 형상화하면서 그 이미지가 자칫 쉽게 소비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 각 인물은 이러한 장면의 외경, 폐허의 부산물을 전시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그들이 겪는 고통의 심상, 수십 년 묵은 감정을 어떻게 끌어올리고자 하는지를 주목해봐야 할 것이다.

옥 : 25년 전 그 일? 다 지난 일 같지? 아니야, 그거 지났다고 사람들 여기 들어오는데 실은 그거 아니라고. 여전히 여기 있어. 여기 우리만 사는 거 아니야. 멧돼지도 살아, 늑대도 살아, 공기도 살고, 바라도 살아, 눈에 보이는 거. 보이지 않는 거, 다 같이 살아, 우린 알아. 그거 다 인정하고 이 마을에 있는 거야. 만약 여기 누군가 새로 올 거라면, 이 땅이랑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와야 해. (…)

작품이 바라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진부하지만 그들의 고통과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식의 사실증명은 쉽지 않은 연출이다. 이는 인물과 인물 간의 대화, 그 사이의 간격에 대한 공감은 오롯이 남겨진 이들의 지난 시간과 지금,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내일에 대한 각자의 대응 방식으로 그 메시지가 와 닿을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에서는 ‘사라져간 이들’, ‘남은 이들’, ‘떠나간 이들’은 ‘들어온 이’, 또 ‘들어올 이’, ‘떠날 이’로 다시 새롭게 앞으로 여기를 바꿀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작품의 메시지가 더 뚜렷이 전달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노스체’의 탐사가 바로 이러한 점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재난지를 ‘별세계(別世界)’로 분리시키려 하고 있으나, 오히려 노스체를 보낸 ‘보이지 않은 유령들’이 있는 우리 세계를 별세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연극은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우리가 연결돼 있다고 믿는 환상을 깨고 결국 불평등한 세계의 진실을 깨닫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으면서 남겨졌다는 것이 상처이고, 또 떠난다는 것이 상처의 회복은 아니라는 것을 선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재난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그들의 대응방식에서 왜 척박한 땅에 남아 버티고 익숙해져 살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마을에 다시 돌아온 현의 엄마 ‘연’과 차별적 외부인이라고 할 수 있는 ‘필’을 통해 해소가 된다. 애초에 마을 밖 외부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희’나 재난구역 관광을 목적으로 마을에 호텔을 짓는다는 소식에 외부에 대한 원망과 경계심을 보이던 '현'이 오히려 보상을 받고 밖으로 나가겠다는 선택에 ‘연’과 ‘필’은 자신들이 밖에서 겪은 소외 경험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남고 싶어서 남는 게 아니라 남을 수밖에 없는 외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의식은 역으로, 바깥 세계의 이곳에 대한 공포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연극에서 아픔과 고통에 대한 중심축은 바깥의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라 남겨진 이들과 들어온 이, 돌아온 이가 오염된 마을에 한데로 머물려 동화되어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으면서 이들의 소외 의식의 새로운 의지, 곧 ‘버티기’와 ‘익숙해지기’가 자연 생명의 회복과 재생의 단초라는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노스체, 아픔과 고통에 대한 공감

이미 우리가 겪은 재난 사회, 그리도 닥쳐올 수많은 재난 속에서의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쉽게 규정짓기는 어렵다. 이 연극에서 말하는 바처럼 함께 묵묵히 작은 걸음이라도 내딛어야 하는 메시지가 특별하게 보이는 것은 이 작품이 좇고 있는 것이 르포적인 재현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당사자적 정서를 통해 공감대를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수없는 아픔과 고통을 겪으면서 꺾이고 또 꺾일지라도 다시 뿌리를 내리고 삶을 이어가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노스체의 ‘다시 돌려놔! 원래대로 돌려놔!’라는 말에 ‘사고 전 상황으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말하면서 ‘그저 일어난 일을 해결하는 거죠’라는 대사를 되새김하게 된다. 그러면서, ‘옥’이 무화과를 따러 나가서 ‘무화과가 열릴 수 있는 정도면, 그걸로 됐다.’라는 말에 ‘회복’의 의미를 새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재난로봇 노스체가 띄엄띄엄 ‘전, 이제 뭘 하면 되죠?’라는 반복되는 물음에 저 연극 속 어딘가 모를 마을이 다름 아닌 바로 이곳, 여기가 재난구역이라 여겨지면서, 바로 내 앞에 있는 노스체에게 그 어떤 대답도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여러분의 아픔과 고통’이 ‘나의 아픔과 고통’으로 바뀌는 데까지 그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노스체가 찾아온 25년 치의 시간일지, 극중‘필’의 빙하 조각, 42만 년 전 공기를 만날 시간이 필요할지는 모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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