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음, 다음에 걸음, 그리고 스페이스바 (사이)
지역공연예술비평플랫폼 <행진(ACTZINE)>2019-01-30 조훈성(연극평론가)
1. 평론하십니까?
연극의 생존, 연극을 위한 삶이 그 어느 때보다 각박한 시절이라고들 했다. 내가 그들 뒤풀이에 늘 앉아있는 것은 아닌데, 김 새어나오는 주황 휘장이 그리운 계절이다 보니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껴 앉아서 국물을 드문드문 떠먹는다. 연극 현장 작업자들의 목소리 열기는 울음 없이도 무척 우울해서 냄비로 가는 숟가락을 들었다가도 나는 방향을 잃고 다시 놓길 여러 번 반복한다. 국물 뜨는 것을 참아가며 듣는 그 개개의 삶의 방식에서의 욕망이란 것들도 참 소박하다. 그게 어쩌면 지역의 연극인들의 ‘생존’에 대한 최저생활 임계치일 수도 있다.
극장에 대해 줄 한 줄 쓸 때, 현실과의 긴장감이 어떻고, 권력 세계와의 담판이니 권력 배후세력에 대한 저항, 참여의식이 필요하다느니, 연극예술의 세계합리화에 대해 죄의식을 공감해야 한다느니, 내가 쓰는 글은 그 누구 씨들의 ‘연극을 위한 삶’을 만나지 않고, ‘혐오’의 불을 키울 뿐, 소외된 삶에서의 ‘나약함’과 ‘모순’을 조금 더 섬세하게 살피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올해 대전의 연극은 굵직굵직한 연극제들이 많았다. 특히 국내 최대 연극축제라고 할 수 있는‘제3회 대한민국연극제’(집행위원장 복영한)를 2005년 전국연극제 개최 이후 13년 만에 대전에서 치러졌다. 여기에 더해 이번 연극제에서는 대전의 극단 새벽의「아버지 없는 아이」가 우수연기상(이여진), 무대예술상(민병구), 희곡상(유보배), 연출상(한선덕) 등 개인상을 거의 휩쓸었고, 단체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지역 연극계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식이 있었다. 작품의 배경이 식민지 이야기여서 자칫 진부한 드라마 전개에서 머물 수 있었으나 식민지 현실 인식을‘아버지의 부재’라는 비극 안에서 개인의 욕망과 불안의 심리를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으면서, ‘재현된’ 현실과 ‘실제’현실의 시대적 맥락을 공유하게 한다. 그래서 인물의 협소한 내재적 갈등의 긴장 국면이 시대적 당위로 확장 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수작으로 인정할만했다.
이렇게 큰 연극제를 치르고 큰 상을 수상했다고 하면 지역 연극 및 공연예술 전반에 걸쳐 대단한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고 극장 문이 미어터질 정도로 관객이 들어차야 되는데, 그렇게 가시적인 효과가 눈에 띄진 않는다. 그렇다고 지역의 연극계가 침체 일로에서 획기적인 전환기에 든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번 대한민국연극제에 대해 나는 ‘지역 연극무대에 크고 작은 연극제는 우리 공연시장에 활기를 가져온 것만은 확실하다’고 적었으며, ‘보다 구체적이고, 의식적이며, 예술적으로 성숙하며 연륜을 가질 시점’에서 ‘대한민국연극제를 계기로 지역 연극의 확실한 도약의 발판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평했다. 한편, 그러면서도 나는 이번 연극제를 기록하면서 속초의 극단 소울씨어터의 「만주전선」심사배제사태에 대한 글을 스스로 검열하여 빠뜨린다. 덧붙여 귀결되는 결말도 다시 적어보건대 이렇게 낯이 뜨거울 수 없다.
“결과적으로 제3회 대한민국연극제 성공 개최는 대내적으로는 구성원 신뢰 구축과 시민대화합을 이루고, 대외적으로는 거점 허브 문화예술도시로 도약하는 총체적 지역문화예술 역량 위상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둘 수 있으며…”
이 덕분인지, 어느 날 극장에 갔더니, 한 극단의 대표님이 나를 알아보시고, “평론하시죠?”라고 먼저 온기 가득한 손과 말을 건넨다. “대전에는 평론이 필요합니다.”, “평론이 있어야 대전의 작품 수준이 올라가죠.”, “언제부터 연극에 대한 글을 쓰셨는지 모르겠지만 정확하고 예리하게 짚어주셨어요.”……, 이렇게 극장 들어가기 전에, 내 점퍼에 묻은 바깥 찬바람을 친절하게 다 털어주어서 아주 훈훈하게 관극을 할 수 있었는데, 작품이 중간쯤이나 흘렀는가 싶어서는 계속 체증이 있고 얼굴이 달아올라 제대로 무대를 집중해볼 수가 없었다.
다시 그 불편한‘평론가’라는 명함을 꺼내 상대방에게 주고는, ‘비평가의 임무’가 무엇인지부터 제대로 살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테리 이글턴은 발터 벤야민의 말을 인용해서 “진정한 비평가에게 필수적인 자질이 ‘자신의 의견’이라는 끔찍한 오해를 하고 있다”라고 언급하면서 “비평가가 더 중요한 인물이 되어 갈수록, 그는 자신의 의견을 대담하게 주장하는 것을 더 피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가 그처럼‘더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만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비평가는 어떤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지역 연극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번 대전연극평론집,『대전연극 비평과 리뷰3 :무대와의 불화』를 펴내면서 쓴 책 서문의 글을 옮겨본다.
“―그는 정의로웠다(사이)그는 사라지지 않는다(사이).”대사를 쓰려고 적어둔 것인지, 언제 읽었던 책이었나, 영화였나, 어떤 인상적 구절을 기억하려고 끼적여놓은 것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이 서문을 쓰려고 궁리하다 자동기술로 써놓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기억나지 않는 것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 눈 앞 세계의 현상에 대해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단 말인가. 그 펼쳐진 광활한 세계에 대한 이유를 찾는다는 것, 그부터가 ‘전환’, ‘개조’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면서 ‘어렵게 말하기’에 관성이 된 나는 ‘비평’을 그렇게 ‘어렵게 쓰기’로 결정해버린 것은 아닌지 뒤돌아보게 된다. ‘의지’가 반영된 세계를 들여다본다면서 무슨 철학의 문제, 미학의 문제를 꺼내들고는 한정된 언어적 사고에 갇혀 딱딱하게 팔짱을 끼고 무릎을 꼬고 짐짓 교양의 유세를 떨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지역 연극의 바라보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사이(pause)’를 포착하고 끊임없는 ‘반성하는 일’을 거듭해본다는 것이다. 평자로서 ‘반성’하는 일이 점점 드물어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평자로서 임무는―바로‘반성’의 ‘메시지’를 부여해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새로운 비평이란 것은 ‘없는 것을 찾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것에 의미를 주는 것’이다.
2. 어떻게 보셨어요?
아홉 번째를 맞는 ‘대전국제소극장연극축제’가 지난 10월 25일부터 11월 11일까지 대전 원도심 중앙로 일대의 상상아트홀(선화동), 소극장 커튼콜(대흥동), 소극장 고도(대흥동) 등 세 개의 소극장에서 펼쳐졌다. ‘국제’가 들어가는 연극제다보니 매년 선보이는 해외초청 공연작품이 는다. 올해는 일본 ‘타타타단 덴코’의 「로미오와 줄리엣」(10.29~27, 상상아트홀), 중국 ‘안경시 황매희예술극원’의 「옥천선」(11.2~3, 상상아트홀), 루마니아 ‘토니불란드라 시어터’의 「6호실」(11.3~4, 커튼콜), 리투아니아 ‘아르투라스 아레미아 시어터’의 「햄릿머신」(11.6~7, 고도), 러시아 ‘자유극단’의 「나비군인」(11.9~10, 상상아트홀)이 초청되었고, 여기에 국내초청공연은 극단 동숭무대의 「오셀로-피는 나지만 죽지 않는다」(11.6~7, 상상아트홀), 극단 후암의 「흑백다방」(11.6~7,커튼콜), 극단 유랑선의 「코스모스 속 세포 하나의 고독」(11.10~11, 커튼콜) 등이 올려졌다. 대전의 극단 공연으로는 극단 손수의 「어떤사건」(10.25~27, 커튼콜), 극단 드림의 「샹쏭다무르」(10.29~31, 커튼콜), 극단 떼아뜨르 고도의 「언덕을 넘어서 가자」(10.31~11.3, 고도)까지 총 11개의 작품이 대전의 가을 무대를 꽉 채웠다.
물론, 해외작품이 많을수록 국제소극장축제다운 구색이 나는 것은 사실이고, 이런 연극제가 아니면 지역에서 좀처럼 외국의 작품을 볼 기회가 많지는 않다. 더구나 연극은 그 무대의 다양한 언어와 몸짓, 소리로 관객을 사로잡기에 이런 연극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역 문화예술의 토양을 넓히는데 갖는 의의는 자못 크다. 그런데, 매년 지역 연극제에 초청되는 해외작품에 대한 평가와 제안의 목소리는 달라지는 것 없이 반복되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연극은 ‘사유하는 힘’, ‘메시지’전달이 중요한데, 특히 별다른 슬로건 없는 연극제에서는 가능한 척도도 없이, 물 건너오면 일단 ‘교훈’이 있고, ‘심미적’환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단정적으로 믿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극장 문을 나서면 ‘어떻게 보셨어요?’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는다. 익숙한데도 참 들을 때마다 낯설다. 나는 서둘러 유명한 평론가들이 그러하듯 친절한 해설자가 되어, 한 줄의 리듬으로 잠언을 짓고, 형식-창조-의 원리에 정통이라도 한 듯 그 작품의 원천적 위상에 접근해야 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는 어떤 ‘자격’도 없이 떠밀려져 나오게 된다. 어느 평자든 모든 대상에 정통하지 않을뿐더러, ‘가치’, ‘미적 감각’등 선호하는 대상도 일치하지 않은데, 내일모레 스펙터클한 영화개봉작을 기다리는 이들처럼 오늘의 관객들은 마치 절대적이면서 탁월한 경험의 결정적 문장을 선사해주길 기대한다.
어느 예술세계가 그렇듯 고유한 감상의 경계는 그 예술인이 포착한 세계적 현상에서 시대적 시선을 읽고, 시대인의 역할과 정의를 성찰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를 재현한 방법에 대한 자극과 공감, 영향을 받기에 이러한 ‘국제’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에는 그‘더-바깥’에 대한 궁금증, 그 동향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외창구적 국제적 연극 교류라는 명분 역할에 잡화점식 이것저것을 늘어놓는 데 머문다면, 타 문화의 특별한 위상을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소통의 기회가 단절, 차단되는 한계만 남기고 단기적 성과, 가시적인 전시 프로그램에 그쳐 지역 연극의 성장 경쟁력에 폐해만 가져올 뿐이다. 넌버벌(Non-verbal) 공연이 아니라면, 해외 공연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 연극의 자막 부분이라도 전문적으로 수용 관객에 맞게 보다 자세하고 정확하게 소개될 필요가 있다. 비싼 초청 비용을 들여 선보이는 외국 극단이라면 무조건 다다익선이 아니라 연극제 수준에 맞춰 해외초청작을 선별하고 오히려 지역 극단에 지원을 확대하고 내실을 기하는 편이 연극제의 정체성과 방향 수립에 보탬이 될 것이다.
3. 묵음, 다음에 걸음, 그리고 스페이스바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블랙코미디 <버드맨>(2014)에서 한물간 할리우드 배우 리건(마이클 키턴)이 브로드웨이의 어떤 바에서 뉴욕타임스의 유명한 연극평론가 타비타(린제이 덩컨)와 논쟁을 벌이는 장면은 내게 그 어떤 장면보다도 인상적이었다. 리건이 공연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녀에게 호감을 사려하지만 거들떠도 안 보는 그녀에게 쏟아 붓는 대사들.
플로베르의“예술가가 되지 못해 비평가가 된 사람은, 군인이 되지 못한 정보원과도 같다”라는 말이 그렇게 뜨끔할 것은 없는데,
리건 : 아니! 안 끝났어. 테크닉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어. 구조에 관한 얘기도 없어. 의도에 대한 언급도 없고. 더 쓰레기 같은 비교로 뒷받침된 쓰레기 같은 의견 더미일 뿐이야…. 당신은 몇 단락을 긁적이지, 하지만 당신 아나? 이 글은 X같이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아. 씨X! 당신은 아무 위험부담이 없어! 아무런! 아무런! 난 X같은 배우야! 이 연극에 내 모든 걸 걸었다고….
위의 대사는 평자에게 너무 자극적이다. 비평한다는 것, 연극을 보고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 되묻게 된다. 지역의 무대를 지켜본다는 것, 나는 연극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이를 쓰는 ‘일’도 정말 행복할 수 있는 일이길 바라마지 않는다.
“겁먹지 말라고, ‘리건’이 무서운 것이 아니잖아.”
극장을 나서‘묵음’이 있을 때가 제일 두려운 일이다. 내가 해야 할 것은 ‘묵음’이 아니라, 걸음이고, 스페이스바에 속도를 내는 일이다. 작가든, 연출가든, 배우든 더 많은 관객을 위해 무대를 꿋꿋이 세우는 것처럼, 평자도 이들을 끌어내야할 의무, 그들이 공감하고 변화할 수 있는 글을 써야할 책임이 있다. 묵음이 묵인일 수 있다는 것, 좁은 지역이라고 마치 작당이라도 짓듯 끼리끼리 비밀스러운 묵인에 동조하거나, 지식인 행세를 하며 계몽적 치장의 용어를 풍부한 표현이라고 합리화하지 않길 스스로에게 당부한다.
‘글쓰기’라는 명확한 방식의 참여가 나의‘자격’을 규정할 수 있다. ‘A thing is a thing, not what is said of that thing.’모든 존재는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평가하는 말이 아닌,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니 그렇게 발을 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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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안녕하세요, 조훈성입니다. 대전에서 연극보면서 한 살짜리 딸아이를 키우는 마흔 넘은 아빠입니다.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극장문 드나드는 게 더 소중해지네요. 얼마 전, 지역연출가 좌담회 때 내년에는 대전에서 상연되는 연극은 모두 다 보겠다는 공언을 했는데, 벌써부터 아찔해집니다. 누구의 책제목을 본 따서, ‘연극 읽어주는 아빠’를 구상하고 있기는 한데, 제 시원찮은 등을 많이들 거들어 밀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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